<그 남자>
집에 돌아온 뒤 옷도 벗지 않은 채, 전화기 옆에 누워 있습니다.
충전 상태를 확인해 보면 한 칸, 두 칸, 세 칸, 아직 세 칸이나 남아있네요.
하지만 혹시 통화가 길어질지도 모르니까
파란불이 들어올 때까지 꽉꽉 충전 시켜야겠습니다.
혹시 벨소리를 못 들을지도 모르니까
벨소리도 제일 시끄러운 걸로 제일 큰 소리로 지정해 놓고
이제 다시 전화기 옆에 길게 드러눕습니다.
"전화야 울려라. 빨리 울려라. 빨리......"
아~ 깜빡 잠이 들었는데 요란한 전화벨이 울립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전화기 저쪽이 조용합니다.
알고 보니 전화벨이 아니라 TV소리였군요.
잠결에 왼쪽 팔로 리모컨을 건드렸나 봅니다.
TV를 끄고 핸드폰과 대화를 시도합니다.
"야! 너 내가 좀 잤다고 너도 자냐? 좀 쉬었으면 이제 울려보자."
'전화 한다고 했으면 전화 좀 해주지.'
밤이 깊고 깊도록 난 전화기 옆에 모로 누워 그녀를 가끔 원망하며
계속 그리워하며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그 여자>
왜 전화가 오지 않을까요?
금세 연락할거처럼 그러더니 빈말로 하는 것 같진 않았는데,
두 번씩이나 전화번호를 물었거든요.
내가 먼저 전화를 해볼까요?
하지만 그랬다가 그 사람이 깜짝 놀라면 아니지 차라리 깜짝 놀라는 게 낫지.
안 놀란 척, "아아, 예예" 그러고는 자기 친구한테
"그 여자 진짜 전화 했더라."
아! 그건 생각만 해도 너무 비참하잖아요.
아닌데, 그럴 사람 같진 않았는데.
그날 헤어질 무렵의 풍경을 찬찬히 돌이켜 봅니다.
그 사람은 내게 전화번호를 물었죠.
나는 그 사람 핸드폰에 직접 내 번호를 꾹꾹 눌렀고
그 사람은 뭘 잘못 눌러 번호가 지워졌다며
다시 한 번 전화기를 내밀었고 나는 다시 번호를 입력했고.
그 사람은 전화해도 되겠냐고 물었고
난 난 아마 그렇게 대답했을 거에요. “저도 연락할게요.”
아, 뭐가 잘못 된 걸까요? 혹시 내가 내 번호를 잘못 입력한 걸까요?
맞아요, 아무래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 손가락이 많이 떨렸거든요.
만약 그렇다면 어떡하죠? 내가 전화를 해야 되는 거죠?
하지만, 하지만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내가 누군지 기억도 못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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