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봄이 오면 나는활짝 피어나기 전에 조금씩 고운 기침을 하는꽃나무들 옆에서 덩달아 봄앓이를 하고 싶다살아 있음의 향기를 온몸으로 피워 올리는 꽃나무와 함께나도 기쁨의 잔기침을 하며 조용히 깨어나고 싶다봄이 오면 나는햇볕이 잘 드는 안뜰에 작은 꽃밭을 일구어 꽃씨를 뿌리고 싶다손에 쥐면 금방 날아갈 듯한 가벼운 꽃씨들을 조심스레 다루면서 흙냄새 가득한 꽃밭에 고운 마음으로 고운 꽃씨를 뿌리고 싶다봄이 오면 나는매일 새소리를 듣고 싶다산에서, 바다에서, 정원에서 고운 목청 돋우는 새들의 지저귐으로봄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되는 나는 새들의 이야기를 해독해서밝고 맑은 시를 쓰는 새의 시인이 되고 싶다바쁘고 힘든 삶의 무게에도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날아다닐 수 있는자유의 은빛 날개 하나를 내 영혼에 달아주고 싶다봄이 오면 조금은 들뜨게 되는 마음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더욱 기쁘고 명랑하게 노래하는 새가 되고 싶다봄이 오면 나는이슬비를 맞고 싶다어릴 적에 항상 우산을 함께 쓰고 다니던 소꼽동무를 불러내어나란이 봄비를 맞으며 봄비 같은 이야기를 속삭이고 싶다꽃과 나무에 생기를 더해주고 아기의 미소처럼 사랑스럽게내 마음에 내리는 봄비, 누가 내게 봄에 낳은 여자 아이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면 서슴없이 '봄비' '단비'라고 하고 싶다봄이 오면 나는풀향기 가득한 잔디밭에서 어린 시절 즐겨 부르던동요를 부르며 흰구름과 나비를 바라보는 아이가 되고 싶다함게 산나물을 캐러 다니던 동무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고,친하면서도 가끔은 꽃샘바람 같은 질투의 눈길을 보내 오던소녀시절의 친구들도 보고 싶다봄이 오면 나는우체국에 가서 새 우표를 사고답장을 미루어 둔 친구에게 다만 몇 줄이라도 진달래빛 사연을 적어 보내고 싶다봄이 오면 나는모양이 예쁜 바구니를 모으고 싶다내가 좋아하는 솔방울, 도토리, 조가비, 리본, 읽다가 만 책,바구니에 담을 꽃과 사탕과 부활달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선물들을정성껏 준비하며 바쁘고도 기쁜 새봄을 맞고 싶다사계절이 다 좋지만 봄에는 꽃들이 너무 많아 어지럼증이 나고마음이 모아지지 않아 봄은 힘들다고 말했던 나도 이젠 갈수록 봄이좋아지고 나이를 먹어도 첫사랑에 눈뜬 소녀처럼 가슴이 설렌다봄이 오면 나는물방울무늬의 옆치마를 입고 싶다유리창을 맑게 닦아 하늘과 나무가 잘 보이게 하고 또 하나의 창문을 마음에 달고 싶다먼지를 털어낸 나의 창가엔 내가 좋아하는 화가가 그린 꽃밭, 구름연못을 걸어 두고, 구석진 자리 한곳에는 앙증스런 꽃삽도 한 개 걸어 두었다가 꽃밭을 손질할 때 들고 나가야겠다조그만 꽃삽을 들고 꽃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아름다운 음성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나는 멀리 봄나들이를 떠나지 않고서도행복한 꽃 마음의 여인부드럽고 따뜻한 봄 마음의 여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봄이 오면 나는 - 이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