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백지

종이섬 2016. 1. 6. 11:28

 

 

    백지 조정권

     

    방황하는 이 옆에서는 아무 질문도 하지 말 것
    침묵으로서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출 것


    그 옆에서는 다만 공손함으로써

    그 영혼에 합당한 예절을 갖출 것


    요란스러운 화장기를 벗길수록 인간의 영혼이란
    고통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 것


    살아온 날들과 또 살아야 할
    수많은 날들의 두려움에 대하여
    지상의 위안이란 마치 간섭과도 같은 것
    그것은 또한 내 스스로에 행하는 강요와도 같은 것


    때때로 침묵함으로써
    이 시간에 나는 마음과 영혼과

    빈손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느끼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결국 뼈를 찔리는 일이 아닌가
    뼛속 깊이 찔리는 그 실감나는 시간의 축적인 영혼
    흔히 바쁘게 지나치다가도 유정한 눈길을 주다 보면
    백지는 비어있음으로써 충분한 불을 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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