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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사생활

종이섬 2013. 1. 14. 12:19


바람의 사생활 이병률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글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그 순간 사내라는 말도 생겼을까

 

저 먼 옛날 오래 전 오늘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

고드름은 매달렸을까

 

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활 같다

그러지 않고는 이리 숨이 찰 수 있나

먼 기차소리라고 하기도 그렇고

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

 

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

그 무엇이 대신해줄 것 같지 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도 차가워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가슴이 생겼으나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열 사내를 스물, ,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 천 년을 흘렀던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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